정치드라마가 아니라 휴먼드라마
“숨겨야할 일들을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라” 이 한 줄의 글귀에서 상상력은 시작된다. 기록에서 실제 사라진 15일 동안을 왕이 대역을 썼다는 설정으로 재구성한다. 일단 그 상상력만큼은 대담하고 재미있다. 이 15일 동안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무엇일까. 왕의 행적과 업적이나 정치권력의 다툼, 정치 외교문제에 대한 분석 성찰 등이 아니다. 왕이 살아가는 하루하루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에 대해, 사람냄새 나는 왕의 숨겨진 모습을 이야기한다. 웃음과 재미는 이 설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볼일을 참다 참다 똥이 마렵다고 토해내는 장면이나 모두 보는 앞에서 방귀를 푸드득 껴대며 볼일을 해결하는 장면에선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왕의 근엄함과 금기를 깨면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여러 장면은 마치 휴먼코디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무리 없는 편안한 재미를 선사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설정과 이야기가 애써 힘주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간다는 것이다. 무엇하나에 무리하게 힘을 주거나 억지웃음을 만들거나 교훈과 주제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흐름에 맡겨 적절히 배치하고 조율할 뿐. 진부하고 익숙한 이야기도 잘만 다듬으면 이렇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다시한번 증명되었다. 연출뿐 아니라 연기의 힘도 대단히 크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역시 이병헌과 류승룡이다. 1인2역을 맡은 이병헌은 영화의 중심에서 광해와 광대를 오가며 모든 장면은 제대로 표현함은 물론 영화의 흐름까지 장악한다. 광대와 광해가 서로를 바라보며 교감에 이르는 지점까지 매듭짓는 멋진 연기였다. 류승용은 또 어떤가. 이병헌의 연기를 다 받아주며 극의 무게감과 조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 후반 전달하고자하는 정치적 메시지에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편안하게 이어져온 사람 사는 이야기 휴먼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메시지가 뻔하고 깊이는 없었지만. 결국 정치란 것도 사람들 더 잘살아보자고 만든 하나의 장치일 뿐.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과 사랑, 믿음 등을 성실히 보여줬기에 <광해>의 정치에서 관객의 울림도 더 커졌던 것이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선후보들에게 <광해>관람을 권하고 싶다. (이미 본 후보도 있지만) 영화를 보며 자신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한지 검증하길 바란다. <광해>가 던져주는 지도자의 모습은 교과서적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다. 국민을 포용할 수 있는 측은지심과 국민을 지켜내는 강인함이 있는가. 그럼에도 관객들이 크게 호응했던 것은 이 평범하고 상식적인 정치인을 뵙기 힘든 현실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상식을 향한 국민들의 간절함이 조선시대나 21세기다 변함없는 모양이다. 이번 대선은 어떤 모습일까.
key: 광해, 이병헌, 정치, 대선, 휴먼드라마
(포스터 및 스틸: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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