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겨운 공포에 메시지도 죽는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든 공포. 고양이가 만든 공포가 아닌 인간으로 인한 공포다. 유기동물, 반려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한낱 물건으로 취급하는 여러 행위들은 요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사회이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무서운 수준이다. 그리고 고립된 독거노인과 현대인의 폐소공포증까지,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는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 :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의 문제제기는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메시지도 전달이 안 되면 아무 소용없다. 상업영화라면 아니 공포영화라면 공포영화로서의 본분은 일단 해야 한다. 좋은 문제의식도 장르적 재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 :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은 새로움은커녕 긴장감을 위해 고심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놀람과 공포는 분명 다르다. 조용히 묻힌 여러 한국공포영화들이 구분하지 못했던 문제다. 차츰 조여 오는 긴장감은 공포의 쾌감으로 이어지지만 깜짝효과 때문에 긴장되는 것은 그냥 짜증일 뿐이다. 뜬금없이 놀래주기만 하니 적절한 타이밍에 귀만 막으면 웃음마저 나온다. 공포장면 또한 진부함의 연속이다. <주온>, <검은 물밑에서>의 패턴이 식상하게 반복된다. 일본호러 특히 <주온>의 귀신은 언제까지 지겹게 따라할 것인가. 한국공포영화가 <주온>의 저주에 걸린 것만 같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중심이야기가 영화전체를 이끌 힘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요소가 필요한데 죄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고양이와 폐소공포증이란 괜찮은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뿐더러 주요 캐릭터들마저 밋밋해서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곁가지 이야기들은 정리도 되지 않고 슬프지도 않은 새드 호러는 또 다시 반복되고 말았다. 결국 한국공포영화가 지겹게 반복해왔던 패턴을 그래도 답습하는 동어반복수준에 그치고 만다. 좋은 문제의식도 지겨운 공포의 반복 때문에 살아날 수 없었던 것이다.